〃핏빛 소나타

웃음 짓는 복사기

적월지향 2005. 12. 17. 08:34

오후내내 멍한 정신으로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창문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쓰벌... 어제는 분명히 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다시 경마를 하면 사람이 아니다.'

"형민아!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예의 사람좋은 얼굴로 싱글거리며 입사 동기인 상규가 내 등을

'툭'치고는 말을 걸었다.

"어제도 또 잃었냐? 야, 야, 이젠 경마 좀 그만해라. 내가 아는

사람치고 경마 해서 돈 땄다는 사람은 한명도 못봤다."

나는 기지개를 크게 키면서 대답했다.

"안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결심했어. 돈도 돈이지만 윤미도

이젠 호락호락하지 않아. 주말마다 경마장에서 살다시피하니..."
"그래. 좀 그만 해라. 너, 그러다 돈 잃고 여자 잃고 다 잃는다."
"알았다. 알았어."

상규가 가버린 후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여자도 잃고... 돈도... 쓰... 벌써 둘다 잃은 것 같은데?'

어제 경마장에서 가진 돈 다 날리고 나와 속이 상해 술을

먹고 윤미에게 전화를 건 것이 화근이었다.

윤미는 평소와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나무라더니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밤새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고 오늘도 오전 내내 연락을 했건만 감감

무소식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다 잘 되겠지...'

"김형민씨! 자?"

최과장이 나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사람 성격은 괜찮은 것

같은데 같이 일하기에는 무척 피곤한 타입이었다.

매사에 꼼꼼한 건 좋지만 어딘가 모르게 음흉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최과장에 대해 소문도 무성했는데

공금을 빼돌려 마련한 집이 세 채라는 둥 부인이 둘이라는

둥 하는 얘기가 그것이었다.

"예? 아... 아뇨..."
"그런데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내가 몇번을 불렀는데..."
"아... 뭣 좀 생각하느라고요."

최과장은 혀를 끌끌차더니 나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최과장에게 다가가니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이번 신입사원 선발 시험지야. 한 부 복사해서 인쇄소에

넘기고 원본은 보관해 둬요."
"아, 예."

나는 시험지를 들고 복사기가 놓여있는 복도로 나갔다.

마침 운좋게도 복사기 앞에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사무실마다 복사기가 있기는 했지만 모두

낡은 것들 뿐이라 우리 인사과 복도에 있는 공용 복사기에 사람

들이 주로 몰리고는 했다. 나는 시험지를 꺼내 유리판 위에 놓고

복사 단추를 눌렀다. 그런데 그때 창밖에서 번개가 '번쩍'치더니

연이어 '꽈르릉'하는 천둥소리가 들리고는 갑자기

정전이 되어 버렸다.

"이런... 제길... 전기가 나갔네?"

어쩔줄 몰라 잠시 복사기 앞에서 서 있는데 복도 끝에서부터

형광등이 하나씩 들어오더니 꺼졌던 복사기가

다시 작동을 시작했다.

"다행이다. 밖으로 안 나가도 되서..."

'끼이잉'하는 소리와 함께 복사된 종이가 출력되었다.

나는 무심코 서류 봉투 속에 복사본을 집어 넣을려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펼쳐보았다.

"아니.. 이게 뭐야? 답이 다 써있네?"

복사기에서 원본을 빼내 복사본과 대조해 보았다.

분명히 원본은 문제만 나와 있는데 복사본은 그 답까지 써있었다.

그것도 타자로 친 것처럼 아주 깨끗하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참나..."

신기한 생각에 한참을 쳐다보다가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아까 갑자기 정전이 되는 바람에 복사기에 어떤 능력이

생긴 것이 아닐까? 묻는 것에 답을 가르쳐 주는...'

만일 내 생각이 맞다면 이건 커다란 횡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릴적 동화책 에서 보던 마술램프의 요정만큼은 안된다

하더라도 머리만 잘 쓰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시험삼아 한 번 해볼까? 당장 알 수 있는 것으로...'

나는 급히 볼펜을 꺼내 빈 종이에 질문을 쓰고는 복사를 했다.

[지금 윤미가 있는 곳 전화번호는?
☞ 4500-3676]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종이에 써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울리고 잠시 후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모니' 커피숍입니다."
"커피숍이예요? 아, 혹시 손님 중에 이윤미씨 계세요?"

전화속에서 마이크로 윤미를 찾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낯익은 윤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여보세요..."

나는 황급히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내... 생각이 맞다... 이건 대단한 횡재야... 이럴수가...'

휴대폰을 든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무엇부터 해야하나. 그래, 그래 우선... 이 복사기를 다른

사람들이 못쓰게 하는 것이...'

급히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 노란색 테이프를 찾아 들고 나와

복사기 커버에 칭칭 감았다. 그리고는 커다랗게

'고장, 감전주의'라고 써 붙였다.

'일단은 됐고... 이젠 저 복사기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옮겨야 할텐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봐도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따 밤에 몰래 들어 와 훔쳐가 버릴까...

그런데 그때 사무실에서 최과장이 문을 빼꼼히

열더니 천천히 걸어나왔다.

"아니, 김형민씨. 지금 뭐하는 거야? 복사 다 했어? 얼래?

이게 뭐야? 복사기 고장났어? 고장났으면 다른 곳에서

해오든가, 복사기를 고치든가 해야지. 멍하니 서 있으면 어떡해?"
'그래. 맞다. 바로 그거야.'

나는 들고있던 시험지 원본을 최과장에게 떠 넘겼다.

"과장님. 우선 복사기부터 고쳐야겠는데요? 다른 사람들도

당장 써야되니... 마침 제 친구가 요 앞에서 대리점을 하니까

제가 가서 고쳐 올께요."
"김형민씨. 기술자를 부르면 되지 그 무거운걸 어떻게 가져

갈려고 그래?"
"요새는 A/S 해달라고 사람을 부르면 빨리 안 온다고요.

직접 가져가야... 어쨌든 다녀 올께요."
"참나. 사람... 성질도 급하지..."

내가 생각해봐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그래도 꽤 큰

복사기인데 혼자서 밀고 내려와 회사에서 쓰는 승합차에 실었다.

"휴우... 일단 복사기를 가지고 나왔으니 집에 모셔다 놓고

똑같은 걸로 한대 사다 회사에 놓으면... 흐흐흐..."

차를 집으로 급히 몰았다.


퇴근시간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6시가 되자마자

모든 약속을 뿌리치고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까 오후에 가져다 놓은 그 복사기가

방 한가운데에서 나를 환영하듯이 늠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후... 후. 잘 있군. 자... 그럼 뭣부터 물어 볼까? 그래 일단은..."

나는 윤미에 대한 질문을 몇가지 적어 복사기에 올려놓고

복사를 했다.

[윤미가 지금 나를 사랑하는가?
☞ 아님.]

[윤미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 없음.]

[윤미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있는가?
☞ 있음.]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물어보지나 말걸... 착찹한 마음에

담배를 한대 꺼내 피워 물고는 다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 도박, 경마...]

내 눈앞에 삶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여자가 대수냐?

돈만 있으면 여자는 언제라도...

더군다나 경마는 내 전공이 아닌가?

[이번주 최고 배당액으로 우승할 말의 이름은?
☞ 날쌘돌이 2]

[배당액은?
☞ 150배]

나는 탄성을 질렀다. 150배라면 100만원만 걸어도

1억 5000만원... 그리고 1000만원이면... 나는 입이 벌어져

다물지 못했다. 한참을 좋아 어쩔줄 몰라 하는데 윤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왜?"

예전 같으면 싸운 후에 윤미가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동을 했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알 수 있는 희한한 복사기가

있으니 말이다.

"너, 내가 다 알아봤어. 나 말고 또 다른 남자가 있더구나.

잘있어. 다신 연락 하지 말고. 넌 조만간 나를 놓친 걸

후회 할거야. 하. 하. 하."
"형민씨. 무슨 소리야? 왜 그래? 갑자기... 어제 일 때문에

삐졌어? 미안해... 난 그저..."
"가증스러운 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왠지 모를 쾌감에 온몸이

떨려왔다. 이렇게 홀가분한 걸 윤미라는 하찮은 계집애에게

목메달아 있었다니...
난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일주일 동안을 돈을 구하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아는 사람들에게 되는대로 모조리 돈을 꾸고 내가 가진 것은

모두 저당잡혀 돈을 마련했다.
경마장으로 가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기만 했다.


"하. 하. 하. 우하하하."

경마장에서 나오던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게 왠 횡재냐... 내평생에 이런 일도 다 생기다니... 나는 가방

속에 가득 담긴 돈다발을 누가 볼세라 소중히 품고 집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가니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복사기가

보란 듯이 놓여져 있었다.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달려가

복사기를 꼬옥 껴안았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하하하. 앞으로 나는 너만 있으면 되...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어주렴... 우하하하."

가방을 열어 돈을 세기 시작했다. 세고 세고 또 세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내일부터는 나의 인생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모든 일들을 이 돈으로 해보고

말리라하는 다짐을 하였다. 이제부터는 정말 말로는 표현 못할

만큼 즐거운 일들이 내 앞에 펼쳐질 것이다...

한참을 즐거운 상상 에 빠져 있다가 문득 복사기를

쳐다 보았다.

'가만 있어봐라. 돈도 생길 만큼 생겼으니 이젠 뭘 물어볼까?

 여자? 아니지 그거야 돈이면 해결되는 일이구... 그래...

누구나 다 궁금해 하는...'


나는 복사기 스위치를 올린 뒤 뚜껑을 열고 질문을 적어

복사를 했다.

[내가 몇살까지 살 수 있을까?
☞ 30살...]

"헉... 30살이라니? 지금 내가 30살인데..."

나는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다시 질문을 적어

복사를 했다.

[정확히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게 되나?
☞ 바로 오늘... 여기서... 나와 같은 상태로...]

[무슨... 얘기인가? '나와 같은 상태...' 라니?
☞ 종이를 들고 복사기 위의 유리판을 자세히 쳐다 볼 것...]

나는 갑자기 등에 한기를 느끼며 복사하던 종이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아... 악!!!"

복사기 안쪽 유리판 아래에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웃고 있는 여자가 한명 있었다.

그녀는 야릇한 미소를 띠우며 한쪽 눈을 씰룩 거렸는데

자세히 바라보니 얼굴의 아래 부분은 온통 칼로 난도질 당해

있었고 무언가를 얘기하려는 듯 입을 계속 우물거리고 있었다.

"뭐... 뭐야... 넌..."

그때 복사기에서 종이가 천천히 미끄러지듯 흘러 나왔다.

나는 정신을 가다 듬고 복사된 종이를 바라보는데 흉칙한

얼굴의 그녀가 복사기 유리판 위로 얼굴을 내밀으며......

[☞ 아까 네가 나만 있으면 된다고 했지? 내가 그렇게 좋아?

그래... 나와 같이 있어줘... 여기는 혼자 있기엔 너무 컴컴해...

제발... 제발... 네 소원은 전부 이루어 졌잖아...

이젠 내 소원을 들어 줄 차례야... 이제는...]

 

불펌하실 수 없습니다.

출처 : oO핏빛 그림자 핏빛 호러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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